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안 페론 (문단 편집) == 페론주의에 관한 평가 == 흔히 [[페론주의]]에 대해, 과도한 임금 인상과 사회보장정책 등 대중영합정책으로 인기를 끌었지만 결국엔 아르헨티나 경제를 허약하게 만들었다는 일각의 비판이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이, 후안 페론이 실행했던 경제정책이 당대의 기준에서 특별히 이상했던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트렌드를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도 케인즈주의 경제학을 반영해 경제정책을 짰고, 소련의 계획경제 체제 역시 성공적으로 잘 돌아가던 시절이었기에 서구 선진국이든 갓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든 부분적이나마 계획경제 제도를 반영하거나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후안 페론도 그런 경우였고, 이건 지금도 정도의 차이일 뿐 마찬가지긴 하다. 또한 후안 페론이 포퓰리즘으로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주로 보수 언론에서 일방적인 비난을 하는 것에 비해 의외로 1980년대까지 페론주의계 정당은 집권 기간이 짧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1973년부터 1976년까지의 공백기를 빼면) 급진시민연합과 반 페론파 성향의 군부가 집권했고, 그나마도 1955년 쿠데타 이후로 페론주의자들의 선거 출마가 금지되어 있었던 상황이었으며, 이후 선거 출마 금지 조치가 풀려서 페론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것도 1973년부터 1976년까지 단 3년 정도에 불과했다. 민주화 직후에는 급진시민연합(라디칼당) 소속의 [[라울 알폰신]]이 집권했고, 페론당 소속으로 집권한 [[카를로스 메넴]]도 대통령 당선 당시에는 페론주의적 공약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는 신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민영화도 대대적으로 단행하여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아르헨티나가 경제 위기에 빠졌을 때 더 이상 팔아치울 공기업이 남아있지 않다고 표현될 정도로 철저하게 감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경제 위기를 극복한 건 페론주의의 계승을 표방한 후임자인 [[네스토르 카를로스 키르치네르|네스토르 키르치네르]]였다.[* 페론주의의 이상은 추구하지만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순응해 내수 시장뿐만 아니라 수출 시장 확보와 해외 투자 유치에도 전력하는 등의 모습으로 '''21세기형 신페론주의'''라 평가받기도 한다.] 후안 페론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쪽에선 1949년부터 1976년까지 그가 통치하던 시대[* 정확하게 말해서 후안 페론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1973년부터 1974년까지 통치했고, 그 사이에는 정권을 잃고 해외 망명중이었다.]에 아르헨티나의 국민 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0%의 성장을 기록했으며 농업형 국가에서 공업형 국가로의 발전을 도모했다는 측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945년에 4,000달러 정도이던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1975년에 이르면 8,000달러를 넘게 되었다. ||[[파일:external/www.economonitor.com/arg1.png|width=300]] ||[[파일:external/cdn.static-economist.com/20140215_FBC282.png|width=450]] || 하지만 이 시기에 아르헨티나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GDP가 상승한 나라들도 있다. 예를 들어 후안 페론이 집권한 1946년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브라질과 일본(제2차 세계대전 직후라서)의 세 배가 넘었지만 1975년에는 브라질의 두 배로 격차가 줄어들었고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벌어졌다. 1946년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의 1인당 GDP는 OECD 평균에 근접했으나 1975년 무렵엔 OECD 평균의 70% 정도까지 떨어졌다. 물론 당대 일본은 아르헨티나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랑 비교해도 높은 성장을 보였기에 직접적인 비교 대상이 되기 어렵고, 브라질은 인구나 자원 면에서 사실 아르헨티나보다 잠재력이 높다고 평가받을 뿐더러, OECD 드립은 1946년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다수의 OECD 가입국이 폭망했다가 다시 전후 복구를 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말장난에 불과하다. 실제 평균적인 지표로 보면 당시 아르헨티나 경제가 엄청 암울했다고 보긴 어렵다. 또 빈민 구제를 경제 개발보다 우선시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경제 성장은 좀 더뎠어도 후안 페론의 치세 기간의 아르헨티나는 적어도 빈민율만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후안 페론은 우선 빈부 격차부터 줄이고, 차후 성장에 집중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후안 페론이 죽은 지 2년 후 '''[[호르헤 비델라]]'''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직후부터 페론 정책을 뒤집겠답시고 우파 정책을 대책없이 남발한 결과, 자국의 알짜배기 기업들은 헐값에 처분되었고 국채는 계속 쌓이는 등 아르헨티나 경제는 성장과 빈부 격차 양쪽에서 모두 몰락하기 시작했다.[* 더욱 악질적인 것은 그러한 기업들을 매각하여 획득한 외화가 호르헤 비델라의 개인 비자금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안 페론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아르헨티나의 경제 부진이나 파탄의 책임을 페론에게만 전가하기는 어렵다. 아르헨티나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경제력이 절정에 달해 프랑스 및 독일과도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이 시기에는 이탈리아, 스페인,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높은 임금을 바라보며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사람들이 많았다.]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게 된 이후에는 주욱 내리막길이었다. 후안 페론의 영향이 남아 있었던 1950년대라면 몰라도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의 아르헨티나의 성장 부진을 온전히 페론의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페론의 인지도 빨에 기댄 확대 해석에 가깝다. 상기했듯 아르헨티나의 경제 부진이나 파탄의 책임은 군부 쿠데타로 많은 인명 희생을 치르고 페론의 정책을 뒤집어보려다 경제까지 망가뜨린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려 했지만 오히려 부작용만 키워버리면서 차라리 안 건드린 것만 못한 수준이 되어버렸다.[* 이 부작용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의 역대 대통령들은 다 이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실제 [[페론주의]]에 긍정적이거나 또는 중립적으로 생각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후안 페론보다는 오히려 페론 실권/사후에 집권한 아르투로 프론디시와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레오폴도 갈티에리]]''', '''[[라울 알폰신]]''', '''[[카를로스 메넴]]''', '''페르난도 델라루아''' 같은 후임 아르헨티나 대통령들의 경제 정책이 오히려 아르헨티나의 경제 악화에 더 악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도입하고 실행했던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천문학적인 외채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 파탄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한 1966년부터 1973년까지 7년밖에 안되는 기간에 [[쿠데타]]가 무려 세 번이나 일어날 정도로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이었으니 국가적인 차원에서 경제 성장에 에너지를 쏟아붓기가 어려웠고, 1976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호르헤 비델라 정권부터 외자 도입을 위해 공기업에 외채를 떠안게 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본격적인 외채 위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오히려 후안 페론의 정권은 외채에 의존하는 경제 발전을 경계했으며, 외채 제로를 선언하며 집권하자마자 바로 영국 은행에 지고 있었던 10억 달러의 외채를 갚는 등 임기 동안 외채를 꾸준히 줄이려고 노력했다.[* 반대로 군사정권인 호르헤 비델라의 치세때는 그렇게 줄여놓은 외채가 폭증하여 단 5년 만에 GDP당 외채 비율이 '''3배'''나 늘었다.] 적어도 후안 페론의 기조가 유지됐다면 막대한 외채로 인한 외환 위기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아르헨티나의 공업이 농업에 비해 낙후된것도[* 제조업 등 제2차 산업 기반이 존재하는 브라질과는 다른 양상이다.] 사실이라 후임 대통령들의 무능과는 별개로 페론주의에 대한 평가는 갑론을박이 꾸준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